노의준 경희한의대 겸임교수, 난치병한약치료전문 할아버지한의원장
지난 달 중순에 있었던 올해 설은 다른 해에 비해 연휴 기간이 긴 편이었던 만큼 명절 증후군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명절 증후군 중에 하나로 자주 언급되는 질병으로 ‘화병’이 있습니다. 화병은 ‘울화병’의 준말입니다. 울화(鬱火)는 울울하고 답답해 일어나는 것으로, 질투나 노여움 따위의 감정이 마음속에서 복받쳐 일어납니다. 이번 호에서는 화병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이에 대한 한약 치험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화병이란
울화병 또는 화증이라는 이름으로 오래전부터 민간에서 사용해 온 증후군의 하나로 현대 말로 하면 ‘화’ 또는 ‘분노’의 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년 이후에 많으며, 여자에게 특히 많습니다. 한의학에서는 화병을 ‘억울한 마음을 삭이지 못해 머리와 옆구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한 증상과 더불어 잠을 잘 자지 못하는 병’이라고 정의했고, 이는 ‘울화병’이라고도 불립니다.
원인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부당한 처우를 장기간에 걸쳐 반복적으로 받으면서 생깁니다. 여기에 갈등 또는 불화로 인해 화가 나고 억울하고 분하고 섭섭한 마음이 많지만 자식 등 이미 형성된 가족 관계나 생계 활동 등을 위한 인간관계를 깨트리고 싶지 않아 참아야 하고 그래서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상태에서도 생깁니다.
위험 요인
중년 이후의 여성에게 많이 발생하고, 마음고생이 많은 사람에게 잘 나타납니다. 흔히 성격이 예민하고 여리고 곧은 사람에게 잘 생깁니다.
증상
주로 호소하는 증상은 ‘열불난다’ ‘속 끓는다’ ‘속 탄다’ ‘치밀어 오른다’ ‘한숨이 자꾸 나온다’ 등 입니다. 심리적인 증상으로는 화가 나고 억울하고 분한 마음, 나만 손해 본 기분, 한 많고 하소연하고 싶은 마음, 미운 마음, 후회하는 마음, 우울하고 불안한 마음 등입니다. 또 신체적으로 가슴이 답답하고, 한숨이 많고, 몸이 화끈화끈 열이 오르고, 치밀어 오르거나 가슴이 뛰고, 가슴에 덩어리가 있는 것 같고, 더운 것을 못 참아 창문을 열어 놓거나 옷을 벗거나 밖으로 나가고 싶고, 입이 마르는 증상이 있습니다. 화병이 오래되면 우울증과 불안증, 심지어 정신병적 장애가 발생할 수 있으며 신체적으로는 고혈압, 심장병, 당뇨병, 관절염 등이 생기기 쉽습니다.
진단과 치료
화병은 전형적인 우울증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또한 우울증, 불안증, 강박증과 겹치는 수가 많습니다. 화병을 종합적으로 잘 치료하기 위해서는 심리검사, 심전도, 혈중 콜레스테롤 검사, 갑상선 기능 검사, 여성 호르몬 검사, 뇌 검사 등을 시행해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현재까지 효과가 알려진 치료는 정신치료(상담), 약물치료, 부부(가족)치료 등이 있습니다. 화병이 한(恨) 정서 같은 한국의 문화와 관련된다고 보기 때문에 치료도 이러한 문화에 바탕을 둔 방법이 되어야 합니다. 과거에는 주로 여성인 주부들에게서 남편과의 갈등, 시부모와의 갈등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 와서는 남성에게도 드물지 않게 나타나고 있고 ‘직장인 화병’, 최근의 학교세태를 반영하는 ‘왕따 화병’ 등 여러 임상 유형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화병 증상으로는 마음에 나타나는 증상과 신체에 나타나는 증상이 있는데 마음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증상은 불안, 초조, 우울, 신경 예민, 자신감 저하 등이 있고 신체적인 증상으로는 속 메스꺼움, 소화불량, 변비, 가슴 두근거림, 손발 저림, 가슴이 답답한 증상 등이 있습니다.
울화병, 화병 혹은 화병으로 알려진 병은 특히 우리나라에서 많은 특이한 질환이라고 합니다. 외국에서는 이러한 병이 없기 때문에 1995년 미국 정신의학학회는 화병을 한국식으로 화병(Hwa-byung, MMS-4)으로 표현하며 영어로 분노증후군(anger syndrome)으로 번역돼 한국인에게 특히 많은 특이한 질병 분노의 억압으로 유발된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치료 사례
한 중년 부인이 자신의 70세 노모를 모시고 필자에게 내원했습니다. 할머님의 병증은 매우 특이한 것이었는데, 밤에 잠을 잘 때 빼고 눈을 뜨고 생활하는 동안에는 항시 양쪽 눈에서 눈물이 쉬지 않고 흘러내린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 중 눈물이 가장 적게 흘러 내릴 때는 눈물이 눈에 그렁그렁 맺혀있는 정도가 있을 뿐 많은 양이든 적은 양이든 하루 중 눈을 뜨고 있는 동안에는 항시 눈물이 흘러내린다고 했습니다.
할머님의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한 것은 5년 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사고로 잃은 뒤부터였습니다. 할머님의 정신적 충격 비탄은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고 이후 할머님의 눈에서는 눈물이 그치지 않게 됐다고 합니다. 그동안 치료를 위해 여러 안과를 다녀봤지만, 의사들마다 특이한 경우이며 치료가 어려운 병증이라고만 하고 별다른 치료를 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할머님은 젊어서부터 시집살이, 남편과의 불화 등으로 소위 화병이라 불리는 가슴앓이를 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곧잘 슬픔과 비탄에 빠져 혼자 울었고 그때부터 심한 불면증에 시달려왔습니다. 아들을 잃고 난 뒤로는 가슴앓이가 심해져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하고 때로 부서질 듯 아파오고 때로 열불이 치밀어 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어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마음이 늘 슬프고 울고만 싶고 남은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져 그냥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의 가부장적 권위적 환경에서 오랫동안 억압받고 짓눌린 여성의 가슴앓이, 불면, 심리적 비탄 등은 화병을 구성하는 주요 병증요건입니다. 이 할머님의 눈물 역시 화병으로부터 비롯돼 아들을 잃은 정신적 충격으로 유발 악화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한약에는 화병으로 인한 가슴의 응어리를 풀고 비탄에 잠긴 마음을 완화해줄 수 있는 뛰어난 약재들이 많이 있습니다. 필자는 이 할머님에게 화병을 치료하는 한약을 처방해 투여했습니다. 복약 열흘 만에 눈물이 멈춰 더 이상 흘러내리지 않게 됐다고 했습니다. 한약을 먹으면 지난 세월 동안 가슴에 맺혔던 응어리가 눈처럼 녹아 내리는 느낌이 들면서 마음이 편안해지더라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님은 동일한 처방을 수개월 연복해 불면증을 치료하고 깊은 잠을 잘 수 있게 됐습니다.
출처 : http://it.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3/18/2015031885003.html